약속의 너머

 W. 오후님

 

 

협소한 가게였지만 생각보다 천장이 높았다. 곳곳을 보란 듯이 장식하고 있는 화려한 자수의 태피스트리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물건들이 쌓여있는 무더기의 규칙성은 없는 것 같았다. 책장에는 고서들이 잔뜩 꽂혀 있었고, 바닥에는 칠이 벗겨진 항아리나 반쯤 깨져 더는 그 역할을 잘하지 못하게 된 그릇 같은 것들이 무질서하게 널려 있었다. 중앙에 놓인 나무판 위에는 자질구레한 악세서리들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마치 나무를 태운 듯한 선선한 향이 났다. 키르, 이것 좀 봐! 역시 이런 구석진 낡은 가게에 잘도 눈길을 준 사람다웠다. 골동품이라는 것도 결국 한 끗 차이로 고물의 운명에서 벗어난 것들일 뿐이니까. 어차피 버려진 것들의 더미라는 점은 별반 다르지 않은걸. 허나 어떤 이의 부름에, 큰 관심 없이 대충 주변을 둘러보던 시선이 마침내 한 곳에 모였다.

 

꽃망울 모양으로 꼼꼼하게 세공한 유리 조각품이 은색 잎사귀 사이에 둘러싸인 은방울꽃 모양의 브로치. 체인으로 연결되어 달랑거리는 진주알이 귀여웠다. 대부분이 손때가 묻어 끝이 거뭇해진 오래된 것들이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의외로 상태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그 옆에 놓여있던 푸른 보석이 박힌 커프스 단추를 집어 이리저리 휙휙 돌려보았다. 이것 좀 봐. 이거, 누군가의 결혼 예물이었나 봐. 토코는 마치 누가 들으면 안 되는 부끄러운 얘기를 하듯 키르아를 끌어당겨 소곤거렸다. 그 말대로, 그 아이가 들고 있는 브로치의 뒷면에는 잘 모르는 타인의 이름으로 보이는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그럼 이것도 마찬가지였으려나. 그는 집어 들었던 단추를 내려놓았다. 수백 개의 약속들이 가득 모인 트레이. 그리고 그는, 그 가운데 의외의 물건을 발견했다.

 

토코가 함께 먹을 아이스크림을 사러 간 동안, 그는 그 가게에서 집어 온 것을 만지작거리며 시험해 보고 있었다. 초콜릿과 바닐라가 반반 섞인 것을 할짝거리며 다가오던 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카메라잖아! 그러는 토코의 옷깃에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던 꽃 모양 브로치가 앙증맞게 달려있었다. 양손에 아이스크림을 쥐고 서둘러 달려오던 그 애는 순간 휘청거리며 한 번 넘어질 뻔하였지만 다행히 금방 중심을 찾고 그의 옆에 바싹 다가와 앉았다. 조심해야지. 가죽 끈을 새로 매단 카메라는 윗부분의 칠이 조금 벗겨진 것을 제외하면 아직 제법 쓸모가 있어 보였다. 갑자기 뭐야? 멋지다, 이거 지금 찍을 수 있어? 불쑥 다가온 낯이 너무 가까워 자연스레 헛기침이 나온다. 순식간에 살짝 더워지는 공기를 느끼며 그는 괜스레 카메라 모서리를 조금 만지작거렸다.

 

사진 같은 건 남겨봤자 곤란한 일 투성이라고 해도... 역시 아깝잖아. 너랑 내가 나온 사진이 하나도 없다는 건. 요즘 나오는 최신 모델과는 다르게, 낡은 카메라의 화면을 채우는 피사체의 형상은 조금 흐릿하고 색이 바래 역시 뿌옇게 느껴질 정도였다. 셔터를 누르면, 아직 설정을 다 만지지 않았기 때문인지 플래시가 팡 터트려져 나와 반사적으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앗, 깜짝이야! 하필 양지였던데다 해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빛도 번지고 얼굴도 평소 모습보다 무척 과장되어 찡그려진 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찍은 사진을 확인한 키르아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잔뜩 찌푸린 미간과 반사적으로 움츠린 어깨, 그리고 힘이 들어가 비뚜름해진 자그마한 입술까지. 뭐야, 왜 웃어? 역시 이상하게 나왔지? 키르, 빨리 보여 줘. 응? 웃지만 말고 빨리이. 서둘러 손을 뻗으며 목에 걸려 있는 것을 뺏으려 해 봤지만 그렇게 쉽게 그녀에게 당할 실력을 가진 이가 아니었기에, 토코는 괜한 헛손질만 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고만 있었다. 괜찮은데 뭐! 조금 더 찍고 보여줄게. 그는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그것을 통해 바라본 너는 언젠가의 꿈에서 본 장면처럼 어쩐지 평소보다 더 아름답고 애틋하게 느껴져서, 그는 그저 놀려줄 생각으로 취한 행동이었음에도 진짜로 셔터를 눌러 촬영을 하고야 말았다.

 

몇 번의 연속 촬영을 끝마치고, 벌써 열댓 개가 넘게 찍힌 사진은 그들은 머리를 맞대어 그늘을 만든 뒤 그 아래 카메라를 눕히고 빤히 바라보았다. 역시 안 예쁘게 찍혔잖아. 그녀가 볼멘소리를 냈다. 하지만 정말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몇몇 사진을 삭제하자고 간절하게 조르는 목소리를 거절하고 대신 다시 한번 카메라의 초점을 잡았다. 하나, 두울... 이번엔 천천히 초를 세기 시작한 목소리 덕분에 준비를 할 여유가 있었다. 뭐, 허둥대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어색하게 두 손가락을 활짝 펴 천진하게 떠올린 미소가 그대로 그곳에 남았다.

 

역시 방금 게 더 나은 것 같은데? 키르아가 그렇게 말하자 토코는 그렇지 않다며 두고두고 볼 거니까 예쁜 모습으로 남기고 싶었다고 중얼거렸다. 음, 하지만 그대로도 괜찮잖아. 어차피 우린 이제부터 계속 같이 있을 거고, 토코 네가 어떤 모습이어도 난 딱히 상관없는걸. 조용히 눈을 깜빡이던 낯 위로 서서히 기쁨이 퍼져간다. 언젠가는 꼭 함께 하자고 했던 어떤 날의 약속. 정말로 우리 둘이, 이제부터 계속 함께구나. 나도, 키르 찍어보고 싶어. 약속의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소원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꿈속에 있는 기분, 마치 존재할 리 없을 거라 생각했던 시간 속에 머물고 있는 느낌.

 

목덜미를 덮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 살짝 들어 올렸다. 약간의 긴장으로 짙게 자리잡힌 어깨 부근의 옷 주름이 살짝 바스락거릴 때면 매끈한 가죽 끈이 그 위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 약간 묵직하고 딱 좋은 정도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건네받은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좋아했다. 이제 갈까? 내민 손을 보고 그녀는 쿡쿡 웃음을 터트렸고, 깍지를 끼어 보란 듯이 들어 올린 손을 렌즈에 담고 셔터를 눌렀다. 찰칵. 이제 한 장. 이제 한 걸음.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언제부턴가 하나의 약속이 되어가고 있었다. 밤이면 흔들리거나 렌즈를 가려 쓰지 못하게 된 사진을 지워냈고, 어딜 가든 제일 먼저 챙기는 것도 그동안의 서로가 담겨있는 그 카메라가 되었다. 어느덧 하나의 내기처럼 되어버린 것은 바로 눈치채지 못하게 서로의 모습을 찍고, 나중에 깜짝 놀라게 해주는 놀이였다. 그냥 몰래 셔터를 누르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놀이였음에도 꽤 긴장감이 맴돌았던 것은, 두 사람 모두 만만치 않게 자신을 노리는 어떤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 놀이는 성공이 목적이라기보다 서로의 무방비한 모습을 얼마나 잘 포착하느냐에 어느덧 목표의 초점이 맞춰지고 있었다. 이건 불공평해. 찍힌 사진을 하나하나 넘겨 보던 토코는 파닥파닥 두 다리를 흔들었다. 무언가 꽁한 것이 있을 때 나오는 귀여운 버릇이었다. 키르는 어떤 모습이든 전부 멋있고 좋은데 난 이런 게 너무 많잖아. 멈춰있는 화면에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막 잠에서 깨어난 그녀의 모습이 있었다. 너도 내가 자는 모습 찍었잖아. 다음으로 넘기면, 창가에 기대어 졸고 있는 키르아의 모습이 보였다. 아, 기억나. 럭키 찬스! 피곤했는지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웬일로 꾸벅꾸벅 떨어지는 고개를 보고 얼마나 기쁘고 신기한 마음이었던가. 럭키 찬스? 토코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집중하지 않으면 금방 놓쳐버리니까.

 

그럼 이건 드물지 않으니까... 럭키는 아니고, 그냥 평소의 바보 토코인가? 빠르게 넘긴 사진들 가운데에는 무언가를 우물거리고 있는 토코의 모습이 참 많았다. 햄스터마냥 조그만 볼을 움직이며 계속 무언가를 먹고 있는 그 모습이 얼마나 웃기고 귀엽던지. 연속으로 찍힌 것인지, 셔터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우연히 카메라가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진도 있었다. 이렇게 보니까 정말 표정이 다양하네. 더위에 지쳐 한숨을 폭 내쉬며 힘들어하는 얼굴, 먹던 아이스크림이 바닥에 떨어져 당황해하는 얼굴, 그리고 자신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웃는, 언제나와 같은 느낌의 해맑은 미소.

 

그녀를 찍고 있는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는 늘 웃고 있다. 사진을 넘겨보다 그것을 깨달은 그는, 잠시 화면 위를 쓸어보다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이쪽으로 갸웃 기울이는 그녀의 재촉을 듣고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앨범을 만들자. 메모리가 거의 다 찰 정도로 많이 찍은 사진. 그냥 하나하나 작은 화면을 넘기며 바라보기엔 아까울 정도로 좋은 것들이 많았다. 앨범? 가족 앨범처럼? 꽤 좋은 제안이었는지 벌써부터 토코의 낯 위로는 긍정의 답이 알아채 주지 않으면 서운할 정도로 활짝 피어있었다. 그거 좋다. 나 할래! 예상대로, 그녀는 이미 완성된 앨범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기뻐했다.

 

넘치는 행복감에 숨기는 것 없이 솔직하게 웃어버렸던 날도, 유난히 힘들어 품 안에 안겨 눈물지었던 날도 전부 그곳에 있었다. 퉁퉁 부은 눈가를 가리던 하얀 손등과 그 위를 다정하게 덮는 은색 달빛의 포근함. 이것도 기억나. 악몽 꿨을 때, 키르가 달래줬잖아. 사진 하나에 추억 하나씩. 그곳에는 모두 그동안 지나온 발자국이 모두 있었다. 키르아 역시 반가운 기억을 만나면 활짝 웃으며 그날을 되짚기 바빴다. 이거, 오늘로 안 끝나겠는데. 아마 두 사람 모두 그런 기분을 느꼈을 테지만 그 누구도 그런 자질구레한 잡담을 말리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여기 점보 파르페 맛있었지. 구름 하나 없이 맑은 하늘 사진을 보면서도 그들은 같은 기억을 공유했다. 엄청 힘든 길이었어. 너무 더웠고.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생각을 하며 같은 말을 할 수 있다는 건 정말 즐거운 거구나. 떨어져 있었을 때는 몰랐던 또 다른 몽글거림이었다. 꼭, 마음이란 게 완전히 피어난 것 같아.

 

약속의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소망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제는 그것에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이제는 꿈을 꾸는 것 같지 않아. 아무런 설명 없이 뱉은 말이었음에도 그들은 충분히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응, 나도.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잡고 있는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와 두근거림. 삶이라는 것이 전해주는 놀라울 정도로 불규칙적인 행복.

 

이 카메라는 그들에게 오기 전, 어떤 이들의 약속을 맺어주다가 그들을 비추게 되었을까. 그 결말의 형태는 해피였을까, 새드였을까? 허나 불분명한 평생을 약속하며 사랑을 얘기한 이들의 증표는 그때 그 시절의 마음을 안은 채 이곳에 있고, 그들은 그것을 당연스럽게 손에 쥐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이어갈 거니까. 언젠가 함께 하자는 소망 너머에는 너무 당연해서 언젠가는 지루해질지도 모르는 평범한 행복이 있었다. 결국 이것이 너무 뻔해서 의미가 흐려지는 날이 와버릴까?

 

허나 그런 것보단 지금의 이 장면에 주목하기로 했다. 아, 이거 눈 감았어. 아하하, 이것 좀 봐! 완전 이상해. 누군가는 이루어지기 직전의 마음이 가장 아름답다고 할지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 말은 완전히 이상한 것이었다. 그야, 이렇게나 매일매일이 따스한걸. 아직 반도 정리하지 못한 사진 수를 보고도 그들은 함부로 한숨 쉬지 않았다. 아직 돌아볼 추억이 이렇게나 남았어. 언젠가 구체적인 기억이 흐려지는 날이 와도 괜찮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야, 확실히 담았으니까. 지금 이곳에, 미래의 앨범에 현재의 의미를 할 수 있는 한 가득 눌러 담았으므로.

 

 

'Novel'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병  (0) 2024.07.14
木理  (0) 2024.07.14
19XX.02.19  (0) 2024.06.08
너의 여름  (0) 2024.05.31
스탠딩 오베이션 - 기립박수  (0) 2024.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