木理

W. 명멸님

 

 

두 팔로 다 감싸도 온전히 안을 수 없는 커다란 나무그늘 아래서 그림자는 둘의 이야기를 야금야금 잡아먹으며 자라난다. 시간이 얼마나 지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얼마나 많은 음절들을 허공에 흘려보냈는지도 모른 채로. 올곧게 마주하던 눈동자가 이제는 한 뼘을 너울거릴 정도로 낮아진 탓에 둘은 나무 기둥에 기대 앉아서야 같은 높이에서 목소리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된다. 시간은 왜 이리 야속할 정도로 빠른 건지. 어릴 적 모습 그대로라며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손에 잡을 새 없이 빠르게 변해버렸구나. 와중에도 네 간지러운 목소리는 여전히 듣기 좋아서 무수한 변화에 울렁이던 마음도 이내 제자리를 찾듯 새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잔잔히 파도친다.

 

서로를 온전히 마주하지 못했던 몇 년의 간극만큼 어색함도 배가됐을 거라 생각했던 건 꽤나 큰 착각이었다. 너를 마주하면 어떤 말을 꺼내는 게 좋을지 한참을 고민할 거라 생각했는데 외려 너무 많은 말들이 쏟아져나와 스스로도 당황하고야 만다. 내가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었나? 몇 년 간 최소한의 소통만 하고 살았던 것이 반발심에 마구잡이로 쏟아져나오는 건 아닌가? 꽤 익숙하지 않은 형색임에도 불쾌하거나 이상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 사이에 바뀐 건 단순히 서로의 키나 또렷해진 목소리 같은 것들만 있는 게 아닐 테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던 네 피부 위로는 어느덧 나무의 나이테마냥 새겨진 상처들이 이목을 끈다. 옷새 아래로 유일하게 보이는 발목만 해도 꽤 자잘한 상처가 눈에 선하게 들어오는데 자신의 시선이 닿지 못하는 곳에는 또 얼마나 많은 자국들이 남아 너를 채우고 있을지. 너스레를 떨기도, 완전히 모른 채 하기도 모호한 감정을 가진 채 곁눈질을 거두며 괜스레 말을 덧붙여본다. 너도 나도 상처가 많네. 반사적으로 잘려나간 제 머리칼을 매만지며 멋쩍은 웃음을 짓는 것도 잊지 않은 채로. 나는 상처라 하기엔 그렇지만... 형이랑 싸우다 조금 잘린 거야. 어느덧 제 손끝에 매달린 눈길에 자신이 봤던 발목 께의 상처가 감히 비교할 것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키르아는 괜스레 자조적인 답변을 해버리고 만다. 상처가 아니라는 제 말에도 여전히 투명한 눈동자를 고정하고 있는 너를 체감하며.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다른 머리칼과 다르게 무성의하게 잘려나간 모습. 머리칼을 만지는 손끝에 흔적처럼 남아있는 자잘한 생채기들. 못 보던 사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훌쩍 커버렸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과 제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는 너무나도 당연한 듯 여전해서, 시간이 우리가 서로를 바라볼 수만 있었던 어느 지점에서 멈춰있는 건 아닌가 오해하게 만드는 네가 유일하게 낯설게 느껴지는. 상처라 부르는 게 낯설다며 괜히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보이는 네가 이상하리만치 아프다.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크기의 것으로.

 

 

"나는 말이야, 키르아처럼 멋지게 싸우다 다친 게 아닌 걸?"

 

 

스스로를 갉아내는 말에 마음이 다잡히지 않던 토코는 괜히 제 치마를 들어올려 상처투성이인 무릎을 훤히 드러내보인다. 자잘하다못해 흉터로도 남아버린 무수한 상처들을 마주하며 보여주는 게 부끄러워지기도 하지만 오히려 키르아이기에 숨기지 않을 수 있는 것. 네 상처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제 실수투성이를 꺼낸 거였는데. 이제 보니 제 상처가 너무나도 많아 네 것이 너무 적다고 말하는 거 같아 후회가 되기도 한다. 그 탓에 횡설수설하듯, 토코는 재빨리 제 상처들의 이유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훈련하면서 다친 것도 아니고, 그냥 길을 가다 넘어진 거야. 키르아는 멋지게 싸우다 다친 건 걸? 상처가 아니라고 하면 안 돼. 나는 바보처럼 넘어진 것도 상처라고 하는 걸. 키르아처럼 좀 더 어른스럽고 든든하게 위로해주고 싶었는데. 괜한 부끄러움에 토코는 제 원피스를 한 번 꼭 쥐어본다. 마음이라도 네게 닿았을까. 걱정하면서.

 

 

"총이 날아와도 피할 줄 알면서, 왜 가만히 있는 땅바닥에 넘어져?"

 

 

제 불안이 무색하게 키르아는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제 상처를 보고 질책하지만, 그 꾸짖음이 정말 자신을 비꼬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물끄러미 바라본 네 얼굴에 담긴 눈빛이 대신 말해주고 있을 정도니까. 정말 자신을 걱정해서 금방이라도 일그러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것도. 히히. 그러게. 왜 그런 불온한 얼굴을 보니 더 마음이 풀리는 걸까. 네 걱정이 이토록 기분이 좋을 일인가. 오히려 미안해해야하는데. 풀어지는 마음에 절로 피어나는 웃음을 어찌 할 방도가 없어 숨김없이 웃고야 만다. 

 

의뢰를 할 때가 아니면 긴장이 안 되는 걸. 그래서 잘 넘어지는 것 같아. 그치만 별 거 아닌 걸!

 

 

"...그러니까 좀 더 같이 얘기해 줘. 키르."

 

 

상처가 이보다 아프더라도. 이보다 많더라도.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키르아가 날 보며 걱정해주기까지 하는 걸. 그럼 아픔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쉽게 날아가버릴 테니까. 너와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함께 할 수만 있다면 더욱. 차라리 이대로 멈춰버렸으면 싶을 정도로.

 

그런 제 말을 듣고도 한참이나 바라보기만 하던 키르아는 머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제게 손을 내민다. 마치 지금 떠나버리기라도 할 듯이.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이 정도인 건가? 우리는 다시 안녕을 고하고 작별해야할 시간인 걸까. 그래도 싫진 않지만, 조금은 더 오래 있고 싶은데. 괜스레 너를 붙잡고 놓아주고 싶지 않다고도 생각할 정도인데. 제 앞에 놓인 손을 붙잡지도, 밀어내지도 못한 채 묵과하고 있던 토코의 무릎 위로 키르아의 목소리가 문을 두드리며 다가온다.

 

같이 걷자. 토코.

 

 

"...응?"

 

 

키르아의 올곧은 문장이 분명히 닿았음에도 제게 오는 길에 헝클어졌다고 생각해버려서, 토코는 그 말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우두커니 앉아있을 뿐이다. 같이 걸어보자고. 부추김 없이 동일한 어조로 제게 말하고 있는 키르아임에도 토코는 곧장 대답하지 못한 채 외려 의아한 얼굴로 멀뚱히 바라보는 것밖엔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차분한 얼굴로 재촉하지 않고 제게 손을 내밀어주는 너는.

 

 

"혼자라서 자꾸 넘어지는 것 같으니까. 손을 잡고 같이 걸으면 덜하지 않을까."

 

 

이런 모습에 고마우면서도 얄미워지는 키르아. 따스함을 알려주고 떠나가버릴 거면서. 결국 나는 네가 떠나고 나면 홀로 걸어야만 하는데. 차라리 함께 걷는 법을 모른다면 허전함도 모르고 살아갈 수 있을 텐데. 키르아를 너무 좋아하지만, 이럴 때면 괜히 미워지기도 해. 너의 다정함을 애초에 몰랐다면 아프지도 않았을 것들인데.

 

돌아가서 다시 넘어지면 어떡해? 다시 혼자 걷게 되면 분명 넘어질 텐데. 두려움에도 결국 붙든 손에 이끌려 차분히 걸음하면서, 혹여나 잡은 손이라도 놓치게 될까 토코는 맞잡은 손에 단단히 힘을 준다. 그에 대답이라도 해주듯 키르아 또한 제 손을 고정하듯 고쳐 잡으면서.

 

 

"지금을 기억해. 손을 잡고 어떻게 걸었는지. 이렇게 넘어지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고, 그래서 아프지도 않았다고. 항상, 누군가와 손을 잡고 걷는다고 생각해."

 

 

그러면 혼자 속도를 내서 걸을 수 없으니까. 뭐가 그리도 급한지 항상 조바심을 내어 걷는 너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잡아주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으니까. 이 감각을 잊지 않게 해주려는 듯 단단히 그러쥔 손에 키르아는 토코의 체온을 온전히 받아든다. 나도 네가 아프지 않길 바라. 사소하게 넘어지는 것조차도, 네게 상처를 내지 못했으면 하는데.

 

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를 간질이며 지나갈 때, 짓궂은 그는 토코와 키르아의 머리칼도 괜스레 한 번 스쳐지나가며 웃는다. 그 웃음이 얼마나 간지러웠는지. 토코는 괜스레 무엇이 좋은지 덩달아 미소를 짓고 만다. 여전히 이 손이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건 슬프게 다가오지만서도 지금 불어오는 바람과 키르아의 손에서 느껴지는 체온의 감각이 너무나도 간지러워서. 감각을 박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울 때마다 꺼내보고 너를 조금이나마 가까이서 회고할 수 있을 텐데. 불어오는 바람에 걸음을 부축받듯 좀 더 가벼워진 걸음으로 둘은 조용한 이곳을 한참이나 걷는다. 제 걸음은 이제 네게 한참을 양보해야 할 보폭이 되었음에도 너는, 좀체 속도를 내지 않는다. 그것마저도 토코를 간질이게 해서.

 

우리 다시 만날 땐 상처가 많이 아물어있겠지? 얼마나 걸었는지. 자신들을 등지고 있던 커다란 나무가 작은 장난감처럼 느껴질 때쯤에 토코는 묵묵히 제 손을 잡고 있는 키르아에게 흘리듯 말을 꺼낸다. 서로에게 다음을 기약하는 게 어쩌면 너무나도 속없는 이야기라는 걸 알지만, 답이 돌아올 수 없는 질문이라는 것도 알지만, 괜히 묻고 싶어지게 된다. 나는 여전히 너를 그릴 거라는 말을 올곧이 꺼내보지는 못하고. 단단히 자신을 잡고 있는 손이 풀리지도 않았는데 괜히.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한참이나 걷던 둘 사이, 꽤나 한참을 지나고야 키르아의 목소리가 잔잔히 따라나온다. 나도 원래 머리로 돌아올 거야. 다음을 온전히 기약하는 것도, 만남을 확신하듯 약속하는 것도 아니건만 그 어떤 말보다도 마음을 놓게 되는 건조하고도 편안한 말. 토코는 소리 없이 미소지을 뿐이다. 

 

어느 지점에서는 자연스럽게 손을 놓았다. 제 손을 놓는 키르아에게 일말의 서운함도 느껴지지 않아 이상하다 싶을 법도 하건만, 여전히 손 안에 남아있는 온기에 토코는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버리고 만다. 이제는 정말 헤어질 시간이겠지. 무슨 말로, 어떤 표정으로 인사해야 좋을까. 키르아에게 짐을 주고 싶진 않지만 마음을 온전히 내려둔 채 인사하기는 아무래도 힘들어서. 그래도 밝게 인사해야지. 영원한 작별이 아니란 걸 아니까.

 

 

"토코."

 

 

마냥 해맑은 얼굴로 인사하는 것이 어려워 마음을 고르고 있던 자신을 부르는 키르아의 목소리는 여전하다. 하필이면 제 이름을 부르는 것도. 응. 키르. 

 

 

"언젠가 함께 떠나게 된다면 그땐 넘어지지 않게 잡아줄게."

 

 

뚜렷한 시기도, 다시 만날 거란 확신도 담겨 있지 않은 문장임에도 그 어떤 약속보다 자신을 단단히 붙잡아서. 결국 너의 미래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니까. 제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에 자그마한 떨림조차 느껴지지 않아서. 너의 확고한 마음에 마음이 피어올라 다시금 웃음이 난다. 불안해할 이유가 없겠구나. 네게 굳이 밝게 인사할 이유도 없구나. 우리는 마지막이 아니니까 언제나와 같이 인사하면 되는 거야. 얼마나 많은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르는 거지만, 같이 할 미래라면 그 사이의 길이는 금방 지나갈 테니까. 찰나를 남겨두지 않아도 좋아. 네가 준 온기와 다정함이 기억에 남아 있을 테니까. 홀로 남은 손이 아쉽지가 않네. 네가 다시 잡아주러 올 테니까.

 

그때까지 넘어지지 않게 노력할게. 너와 같이 걷던 순간을 잊어버려서, 다시금 함께 하게 되었을 때 내가 성큼성큼 홀로 가버리면 안 되니까. 키르아가 내 보폭을 맞춰준 것처럼 나도 키르아와 함께 걸을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하니까. 내 상처를 보며 아파하던 네 표정을 다시 짓게 만들 순 없으니까.

 

 

 

안녕. 키르아.

 

애쓰지 않아도 지어지는 웃음을 네게 선물하며. 토코는 등돌리지 않고 제게 인사하는 키르아를 두 눈에 한아름 담는다. 안녕. 네가 가르쳐 준 온기가 남아있는 그날까지.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러 올 때까지. 차분히 불어오는 바람은 여전히 웃으며 서로의 발끝에 매달린다. 결국 같은 하늘 아래 있을 테니. 안녕.

 

토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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